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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30일 토요일

하나님 나라의 도전 (3) - 회복의 길

 


1. 요약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림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며 유사 신을 찾아 헤매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계 회복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무엇인가

인간은 이러한 자신의 근원적 문제 해결을 위해서 끊임 없이 절대적 진리나 구원 또는 깨달음을 찾는다. 첫째로 양심과 선행이다. 양심에 따라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이익에 반하거나 선을 행하는데 고통이 수반되면 그 양심이 무너지기 때문에, 부실한 양심과 선행에 의지해서 잃어버린 신을 찾는 것은 불가능이다. 둘째, 탐구와 연구이다. 인류는 본질적인 질문들을 하고 그 답을 찾아왔다. 이 답들은 어느 정도 통찰을 주지만 삶의 궁극적인 답을 주지 못하며 이기심으로 오염되어 있으며 지식과 삶은 여전히 괴리되어 있다.

셋째, 기도와 종교 행위이다. 인류는 신을 상정하고 종교적 행위를 실천했다. 그러나 인간의 종교 행위는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종교적 행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고 변함 없이 사랑하기를 원한다.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우주 밖에 존재하는 신을 만날 수 없고, 신을 내 마음대로 조작하려는 종교 행위를 통해서도 신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한 사람을 찾아가 인격적으로 반응할 기회를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찾아가시고 나를 믿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 없이 망가진 모든 민족을 회복시키시겠다 라고 말씀하신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다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그분을 따라갔다.

아브라함의 위대성은 그의 진실한 반응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기 위한 중요한 원리는, 깨달은 만큼 진실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창세기 156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라는 것은, 하나님께 인정 받고 그분과의 관계가 바로 섰다 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소중히 여기셨고 그 가치를 인정하셨다.

대다수 종교는 인간의 열심으로 신을 감동시키는 신심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믿음은 신심과는 다르다. 기독교의 믿음은 하나님에 관해 알고 깨달은 만큼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며, 그 상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 자신을 알려주실 때에 알게 된 만큼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며 전인격적으로 반응할 때에 관계가 발전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을 알고 따르고 사랑하며 진실하게 반응하는 믿음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깨달은 것에 대하여 인격적으로 반응할 때에 깨어진 개인과 세상이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믿고 그렇게 따라가는 것이므로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믿음이야 말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의 원리이며,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끌어 가시고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가 동참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2. 책에서 한마디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알아라. 나를 안 만큼 나를 따라라. 나를 알면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안 만큼 진실하게 내게 반응하는 것이 믿음이고, 이런 믿음을 볼 때 나는 기쁘다.”

 

3. 성경적 관점에서 보기

창세기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15:5 He took him outside and said, "Look up at the heavens and count the stars--if indeed you can count them." Then he said to him, "So shall your offspring be."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15:6 Abram believed the LORD, and he credited it to him as righteousness.

15:1–6 In this chapter, we see for the first time dialogue between the Lord and Abram. The childless Abram is fearful about his future. He thinks that his servant, Eliezer of Damascus, will have to be his surrogate heir (a practice common in the ancient world), but God reassures him that he will in fact have his own children—as many as the stars. Abram believes God’s word, throwing himself upon God’s promises. As a result of Abram’s faith, God declares him righteous. Long before the Law of Moses, Abram is righteous before God (Ro 4:1–3). 창세기 15장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를 봅니다. 자녀가 없는 아브라함은 자신의 미래를 두려워합니다. 그는 자신의 종인 다메섹 엘리에셀이 자신의 대리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별과 같이 많은 그 자신의 자녀를 갖게 될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의 약속에 자기 자신을 던졌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있기 오래 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였습니다. (로마서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Stephen Dempster, “Genesis,” in The NIV Grace and Truth Study Bible, ed. R. Albert Mohler Jr. (Grand Rapids, MI: Zondervan, 2021), 22.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개역개정) 11:6 And without faith it is impossible to please God, because anyone who comes to him must believe that he exists and that he rewards those who earnestly seek him. (NIV)

11:6 impossible to please. Enoch pleased God because he had faith. Without such faith it is not possible for anyone to “walk with God” or “please Him” (cf. 10:38). He is. The emphasis here is on “He,” the true God. Genuine faith does not simply believe that a divine being exists, but that the God of Scripture is the only real and true God who exists. Not believing that God exists is equivalent to calling Him a liar (cf. 1Jn 5:10). rewarder. A person must believe not only that the true God exists, but also that He will reward men’s faith in Him with forgiveness and righteousness, because He has promised to do so (cf. 10:35; Ge 15:1; Dt 4:29; 1Ch 28:9; Ps 58:11; Is 40:10).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 : 에녹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과 동행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참 하나님이신 “그분” 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단순히 신적인 존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이 유일한 참되고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 것은, 그분을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상 주시는 이 : 사람은 참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분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용서와 의로움으로 그분을 믿는 사람들의 믿음에 보상을 주실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John F. MacArthur Jr., The MacArthur Study Bible: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hville, TN: Thomas Nelson Publishers, 2006), Heb 11:6.

 

4. RCB 관점으

김형국 목사님의 글은 따뜻하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의 이미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분을 떠난 인간을 얼마나 기다리시는지를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저자는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한 인간의 다양한 시도들이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잘 설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챕터에서는 아쉬운 점은, 성경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이라는 것을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신뢰 정도로 이해하였다는 것이다. 어쩌면 책의 초반이기 때문에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믿음의 반응이라는 측면을 더 드러내기 위하여 그렇게 설명하신 듯 하다.

저자는 마음을 다해 신에게 간구하는 신심과, 하나님에 관해 알고 깨달은 것에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믿음을 구별하면서 후자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며 성경적인 믿음이라고 설명한다. 일견 탁월한 설명 같지만, 이러한 관점으로만 믿음으로 이해한다면 인간의 반응이라는 측면에서는 이 두가지를 구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저자는 신심과 믿음의 반응을 애써 동일선상에 놓고 싶어하지 않지만, 그러나 인간의 열심이라는 것에는 기준이 없기 때문에 결국 잘 모르는 신을 열심히 믿고 착하게 살든지, 혹은 하나님을 잘 믿고 착하게 살든지의 기준으로 밖에 기독교의 차이점을 설명해내지 못한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내가 믿음으로 반응하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다라고 주장한다면, “도대체 얼만큼 반응하면인정을 받는다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죄 사함과 그분이 주시는 완전한 의로움이 약화된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 빼 버린다면, 기독교는 사실상 타 종교와 다를 바 없는 것이 된다. 그저, 열심히 믿으면 인정 받는 인과응보의 종교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했다 라고 말씀하신다 (3:23).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나님에게 반응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반응이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의로움이라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을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 의 문제가 아니라 로마서 4장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가 하나님을 믿은 것이 그의 의로움이 되었고, 요한복음 8장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고 믿었던 아브라함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프로울과 같은 보수적인 신학자도 믿음과 순종이 나란히 가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는 심지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음으로 겁쟁이가 되어버린 현대 교회를 질타한다. 그러나 그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믿음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를 믿은 자이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으며, 김형국 목사님이 그토록 강조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은 단순히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반응하여서 일어난 것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이다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선택한 자에게 믿음을 주시는 그 하나님의 신비한 경륜을 인정해야 한다. 에베소서 3장에서 바울 사도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성도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놀라움을 더 깊이 알아가기를 간구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며, 인간의 이성과 보편적 상식을 뛰어 넘어 은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온 마음 다해 찬양할 수 밖에 없으며, 더욱 왕되신 주님께 순종하기를 목숨을 다해 애쓰는 자들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5. 적용

1) 지금보다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할 수 있기 위해서 당신이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당신의 삶에서 한걸음 더 전진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 추가로 읽어볼 자료

- 참된 믿음의 열매로서 순종은 믿음과 분리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히브리서 11장은 아벨, 에녹, 노아의 믿음을 언급한 뒤 아브라함을 소개한다. 앞 장에서 말한 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린다. 8절을 보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믿음’과 ‘순종’이 나란히 연결된 것에 주목하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사는 삶이 믿음의 본질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의 위대한 표상이라고 역설했다( 4:17).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그 즉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에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아브라함은 복종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구체적으로 보였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복종의 행위를 통해 믿음의 열매를 보여 주었다고 증언했다( 2:21)…

선조들이 우리를 위해 감수했던 희생을 우리가 기꺼이 감수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피가 땅속에서 울부짖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겁쟁이들만 가득한 교회를 결코 존귀하게 여기지 않으실 것이다.

승리하는 교회가 되려면 먼저 싸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목숨을 걸고 기꺼이 영적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신앙의 용사들이 그들 삶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을 때 복음이 가장 명확하고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안락함에 깊이 젖은 우리는 세상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로 살아갔던 사람들처럼 살기보다 세상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을 더 좋아한다

믿음, 자신 있게 대답하라 | 찰스 스펄전, R. C. 스프로울, 조나단 에드워즈, 황을호, 조계광 저

 

- 아브라함의 믿음은 단순히 신뢰가 아니라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며, 그것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측면에서

아브라함은 세상의 성을 짓기보다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실 성을 바라며 기다렸다. 그는 단지 거할 땅 이상의 것을 추구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8:31, 32)고 말씀하시자 바리새인들은 그 말을 불쾌히 여기며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33)고 대꾸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39, 56)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히브리서 저자와 똑같은 말씀을 하신 셈이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을 뿐 아니라 모든 약속을 온전히 이루실 구원자를 고대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는 방식과 새 언약의 공동체에 속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는 방식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지금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과거에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구약 시대의 구원의 근거 역시 소나 염소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였다. 소나 염소의 피는 죄를 없애지 못한다( 10:4, 11). 그러한 희생 제사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예표일 뿐이다( 9:13, 14). 그것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예시하는 그림자였다. 오직 그분의 보혈만이 죄를 없앨 수 있다.

아브라함과 우리는 시간상의 위치가 다를 뿐이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은 미래의 십자가를 바라보았고, 우리는 과거의 십자가를 바라본다. 그는 약속을 믿었고, 우리는 성취된 약속을 믿는다. 오늘날 우리에게나 그때의 아브라함에게나 구원의 길은 동일하다.

믿음, 자신 있게 대답하라 | 찰스 스펄전, R. C. 스프로울, 조나단 에드워즈, 황을호, 조계광 저

 

-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선물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이기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기울일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6:65)고 말씀하셨다. 같은 복음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반응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 궁극적인 이유는 전자의 경우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난 반면, 후자의 경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교리의 난해한 지점은 성령께서 모든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이 문제로 인해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진다. 구원을 얻는 믿음은 성령의 선물이고 그 선물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 선물을 모두에게 주시지 않는 걸까?

이 문제는 우리를 선택 교리로 인도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4장은 구원을 얻는 믿음을 선택과 연결시킨다. 믿음의 은혜, 곧 선택받은 자들이 믿어 영혼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는 그들 마음속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영의 사역이다.” 이 말은 곧 모두가 신자가 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믿는 능력을 주기로 작정하신 사람들만 신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을 함축한다. 이것이 선택 교리의 핵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로 구원을 얻었다. 우리를 구원한 그 믿음조차도 우리의 육신과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에 의한 결과이다. 이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한다.

믿음, 자신 있게 대답하라 | 찰스 스펄전, R. C. 스프로울, 조나단 에드워즈, 황을호, 조계광 저

"하나님 나라의 도전" 북클럽 인도자용 자료모음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09/blog-post.html

2023년 9월 28일 목요일

"선교적 교회로 가는 길" 북클럽 인도자용 자료모음

 


* 선교적 교회로 가는 길 (1) - 본질적인 질문을 하다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09/1_13.html

* 선교적 교회로 가는 길 (2) - 교회의 위기를 말하다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09/2_28.html

* 선교적 교회로 가는 길 (3) - 참된 교회를 말하다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10/3.html

* 선교적 교회로 가는 길 (4) - 하나님의 선교를 말하다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10/4_24.html

* 선교적 교회로 가는 길 (5) -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보다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11/5.html

* 선교적 교회로 가는 길 (6) - 선교적 교회를 정의하다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11/6.html

* 선교적 교회로 가는 길 (7) - 선교적 교회의 요소를 말하다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12/7.html

선교적 교회로 가는 길 (2) - 교회의 위기를 말하다

 

1. 요약

서구교회는 심각하게 퇴보하였다. 말씀보다 이성을 더 중시한 계몽주의로 인하여 지식은 공적 진리와 사적 진리로 나누어졌다. 교회는 무기력 해졌고 신앙 생활은 개인 영성으로 축소되었으며 교회는 세상에서 고립되었다. 성도의 헌신은 줄어들고 예배는 간소화되었다. 제자도가 강조되지 않아 교회는 어두움에 맞서 싸울 힘을 상실하고 세상과 타협하였다.

이 와중에 성장한 교회들이 있다. 구도자 중심 예배는 영혼 구원을 위한 노력이 좋았지만 종교적 소비자를 만들어 내었다. 긍정적 사고를 강조하는 경우는 사고의 변화를 시도한 것은 좋았지만 죄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한 명백한 가르침이 없었다. 이머징 교회 운동은 전통적 예배 형식과 교회 제도가 아닌 자유로운 신앙의 표현을 추구했다. 젊은 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고민은 좋았지만 성경 해석을 지나치게 신세대에게 맞추었다.

이러한 운동은 모두 여러 문제가 있기에 성경적 교회관을 검토함으로 교회를 살려야 한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 성장이란 이데올로기다. 교회가 그 본질적인 목적이 아니라 외형적 성장과 물질적 축복에 집착했다. 한국 교회가 쇠퇴하는 현재의 상황 속에서 진정한 복음의 회복, 교회의 공공성 회복,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입각한 성경적 교회론이 회복되어야 한다.

이민 교회는 개척과 성장 그리고 성숙의 단계를 거친다. 현재 이민 교회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일어나 대형 교회 혹은 자립이 어려운 소형 교회로만 나뉘어 있다. 이민 교회는 교회의 분명한 정체성 확립이 필요하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소외된 자들 그리고 다양한 인종을 향해서 사역해야 한다. 전수 받은 신앙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속화된 세상 속에서 어떤 의미를 주는지 자녀들은 알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차세대에 신앙을 올바로 전수해야 한다. 청교도 1세대들의 비장한 신념이 필요하다. 언어와 문화의 단절을 벗어나서 교회 주위의 인종과 사회에 다가가야 한다.

현재의 탈기독교 사회 속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시작한 운동이 선교적 교회 운동이다. 이것은 교회가 올바른 성경적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이것은 서구 교회의 몰락 속에서 시작된 운동이지만, 위기에 처한 한국 교회와 이민 교회에도 적합한 운동이다. 단순히 선교를 더 하자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십계명을 잘 지킴으로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라는 사명은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제 이 사명과 정체성이 교회에 전해진 것이다. 성경적인 교회는, “죄로 가득 찬 세상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신실한 제자들의 공동체이다.


 
2. 책에서 한마디

위기에 빠진 북미교회의 실상을 교인 감소, 목회자의 탈진, 청년 세대의 이탈, 교파의 무의미, 성경에 대한 무지, 교인들의 분열, 텔레비전 교회의 문제점들, 전통적 예배 형태의 한계, 참된 영성의 쇠퇴, 복음에 대한 혼선이다.


 
3. 성경적 관점에서 보기

출애굽기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19:5 Now if you obey me fully and keep my covenant, then out of all nations you will be my treasured possession. Although the whole earth is mine,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19:6 you will be for me a kingdom of priests and a holy nation.' These are the words you are to speak to the Israelites."

19:4–6 The Lord calls Israel to be faithful to his covenant even before he has revealed all of its particulars (v. 5). What they have seen in Egypt (v. 4) reminds them that God’s covenant relationship with them is prior to and essential for their living as his people.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모든 세부 사항을 알리시기도 전에 이스라엘에게 그의 언약에 충실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본 것은, 하나님과 그들의 언약 관계가 그분의 백성으로써 그들의 삶 보다 앞서는 것이고 필수적인 것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4.

19:5 if ye will obey. The Lord redeemed them out of His free grace promised to Abraham (v. 4; 6:6–8; 20:2), but the enjoyment of the blessings depended on the obedience of the nation (note plural ye). Only those who keep my covenant experience the covenant relationship (Gen. 17:9, 14; Ps. 103:17–18). peculiar treasure. God’s precious and beloved possession (Deut. 7:6; 14:2; 26:18; Ps. 135:4; Mal. 3:17); term used of a king’s gold and silver (1 Chron. 29:3; Eccl. 2:8). 너희가 내 언약을 지키면 :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순수한 은혜로 그들을 구속하셨으나, 축복을 누리는 것은 그 민족(개인이 아니라 복수의 너희)의 순종에 달려 있었습니다. 주님의 언약을 지키는 자만이 언약 관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내 소유 : 하나님의 귀한 그리고 사랑 받는 소유를 의미하며, 왕의 금과 은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116.

19:6 HOLY NATION. God’s people would be different from all the other peoples and would be given the special task of representing God. 거룩한 나라 :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모든 민족과 다를 것이며, 하나님을 대표하는 특별한 임무를 받게 될 것입니다.

Lyman Coleman, ed., Life Connections Study Bible (Nashville, TN: Holman Bibles, 2019), 115.

my kingdom of priests, my holy nation: The nation was to become intermediaries between a holy God and a lost world. Through them God would reveal himself (see 1 Pet 2:9–10). 나의 제사장 나라, 나의 거룩한 나라 : 그 나라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잃어버린 세상 사이의 중개자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 Study Bible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2008), Ex 19:5–6.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개역개정) 2:9 But you are a chosen people, a royal priesthood, a holy nation, a people belonging to God, that you may declare the praises of him who called you out of darkness into his wonderful light. (NIV)

2:9 Peter applies descriptions of the Israelites in the OT (see, e.g., Exod 19:5–6) to his primarily Gentile audience, indicating that they—like all Christians—are truly God’s people in the new covenant era. 베드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설명을 그의 주된 이방인 청중에게 적용하며 그들이 모든 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새 언약 시대의 참된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 Study Bible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2008), 1 Pe 2:9.

2:9 a royal priesthood, a holy nation Describes the people of God—those who place their trust in Christ—using language formerly used of Israel.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 이것은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사용했던 언어를 사용하여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즉 하나님의 백성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In the ot, beginning with the exodus narrative, the people of Israel are often described as a nation chosen by God to serve as a priesthood (see Exod 19:5–6; Deut 4:20; 7:6; 14:2; Isa 43:20–21). This language is now applied to believers in Jesus since they are connected to the cornerstone, Christ, and belong to the chosen people of God (1 Pet 2:9–10). As a royal priesthood, all believers are set apart as ministers of the new covenant to the world. Thus, Peter reminds his audience that their time living in exile serves as an opportunity to mediate God’s blessing to the foreigners around them (see 1:1 and note). 구약에서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종종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도록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으로 묘사됩니다. 이 언어는 이제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 적용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고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모든 신자는 세상을 향한 새 언약의 사역자로 구별됩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그의 편지를 받는 이들에게 그들이 흩어져 타국 생활을 하는 것이 그들 주변에 있는 외국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중재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proclaim the virtues Describes the purpose of God choosing Christians as His people. Christians are not only called to bless the world, but to make known the mighty acts of God they have witnessed (compare Gen 12:1–3). Here Peter probably has in mind the resurrection of Christ and the conversion of the believers to whom he writes (compare Acts 2:22–24).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그분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목적을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축복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목격한 하나님의 강력한 일하심을 알리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아마도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편지를 받는 신자들의 회심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6), 1 Pe 2:9.
 


4. RCB 관점으

송민호 목사님의 교회의 위기를 짚어내는 능력은 매우 탁월하다. 그의 목회적인 경험을 통해서 한국 교회와 이민 교회까지 그들이 가진 약점을 짚어낸다. 현재의 교회의 쇠락해진 모습에 대한 근본적 이유를 파악할 때에 계몽주의로 거슬러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인류는 결국 진리를 이층 구조로 나누었음을 잘 지적하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기에 교회는 성장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혔고 성공주의와 맘몬주의가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교회의 본질과 거리가 있는 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기 시작하였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성경적 교회의 본질의 회복”이야 말로 문제 해결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전략이라고 주장한다.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논리적으로 조금 성급한 주장인 듯 보였다. 왜냐하면, 저자가 설명한 것처럼 현대 교회의 실패의 뿌리는 성경적인 교회의 본질을 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이성에 대한 강조와 말씀에 대한 경시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아무리 말씀을 펴 놓고 이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고 한들 그것을 듣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말씀에 대한 존중함이 없는데 과연 우리가 원하는 교회의 회복이 일어날 것인가라는 더욱 근본적인 질문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문제의 원인, 그 근본으로 파고들어가야 한다. 말씀에 대한 존중의 회복이라는 것을 성도 안에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가 더욱 목회의 우선 순위에 놓여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의 신앙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말씀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 전략과 구조가 존재해야 한다. 특별히 그런 면에서 설교는 열정적이어야 하며, 성경에 근거해야 하며, 이성과 세상을 압도하는 말씀의 가치를 탁월하게 드러낼 정도로 아름다워야 한다. 성도가 말씀을 가까이하고 이해하고 붙들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실천의 방법을 제시하고 그것을 습관화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것이 전제된 상태로 성경적 교회의 회복을 추구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십계명을 어겼고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에 실패한 것이라면, 신약의 교회는 정확하게 그것의 반대로 행해야 한다. 첫째는 순종하는 교회이다. 듣기만 하는 교회는 의미가 없다. 어떻게 하면 순종하는 교회로 만들 내고야 말 것인가에 집중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과 분명하게 다른 부분들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선명하게 드러내는데 교회의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공동체적으로 교회의 운영은 회사의 운영과 분명하게 달라야 하며, 개인적으로 말씀을 들은 성도에게 한주 동안 실천할 구체적 행동 한가지를 요구해야만 한다. 

둘째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교회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놀라운 새 언약을 손에 들고 세상에 전함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중재하는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라면, 현재 교회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보다도 더 교회의 역량을 여기에 집중해서 전략적으로 실천하여야 한다. 이 두가지를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 세상 가운데 선포가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노방 전도는 간혹가다 소수가 시도하는 행사가 아니라, 매주 예배 후에 어린이를 포함하여 모든 성도가 나가서 실천해야 하는 교회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성경적 교회의 회복은, 처음에 계몽주의로 부터 시작된 진리의 이층구조의 분리를 다시 결합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중세 시대처럼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는 형식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을 적극적으로 섬기는 모습으로 다가가야 한다. 기독교의 진리는 단순히 교회 안에서 머무르는 진리가 아니며 하나님의 진리가 세상 속에서도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성도는 거룩하며 동시에 지혜롭고 탁월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되 하나님의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저자의 이야기가 탁상공론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강력한 본질적 목적만이 아니라 그것을 이룰 전략과 추진력이 모두 필요하다. 루터가 이야기한 것처럼 좋은 구두를 만드는 구두공이 있어야 하고, 루이스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경제에 재능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좋은 경제학자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세상 속에서 세상과는 분명히 다른 그리스도인, 그리고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는 실천적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그러한 실천적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내는 훈련소가 되어야하고 그들을 위하여 필요한 마땅한 양육이 있어야 한다. 리더십은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이루어낼 것인가에 집착에 가까운 노력으로 지혜를 모으고 불굴의 의지로 추진해야 한다. 

단순히, 선교적 교회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공부하는 차원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것을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어떻게 구현해 낼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추가적인 공부와 실천이 있어야 한다. 결국 이것은, 선교적 교회를 구현하기 위한 공동체의 방법론으로 들어가게 되고, 어떻게 하면 더욱 탁월하게 성도를 훈련할 수 있는가에 대한 교육의 본질과 방법에 대한 고민으로 향하게 된다. 존 헤네시가 고민했던 공동체를 실제로 변화시키기 위한 리더십의 고민과 실천이 바로 그런 탁월한 예이다. RCB가 추구하는 성도에게 말씀에 대한 깊이와 실천적 지혜를 심어주는 북클럽의 연구와 실행이 바로 그런 탁월한 예이다. 이 방향성 안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교회만이, 성경적 교회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5. 적용

1) 당신 자신과 당신의 교회는 어느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합니까? 말씀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 예배와 설교, 그리고 개인의 습관이 있습니까? 

2) 거룩함을 드러내고 복음 전도를 실천하기 위한 이번 한 주 동안 당신의 구체적 행동 한가지는 무엇입니까?
 


* 추가적으로 읽어볼 자료

- 교회의 본질적인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도의 역량을 키워야만 한다는 측면에서

사람들은 “교회가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고들 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으로 말했느냐에 따라 옳은 말이 될 수도 있고 그른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옳은 말이 되려면 그들이 말하는 바 ‘교회’는 곧 실천적인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켜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을 이끈다’는 말은 어떤 그리스도인들—경제나 정치에 적합한 재능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경제학자나 정치가가 되어야 하며, 모든 경제학자와 정치가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하고, 그들은 정치 경제 분야에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원칙을 실천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다른 이들이 그런 일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상당히 빠른 시간 안에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풀어 낼 기독교적 해결책을 찾게 되겠지요.

순전한 기독교 | C. S. 루이스, 이종태, 장경철 저

- 조직과 개인의 역량을 키운다는 것은 복합적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그래서 나는 총장으로서 성공을 거두었을까? 그 과정에서 훌륭한 리더가 되었을까? 우리 팀은 우수한 대학을 한층 더 우수하게 만들었을까? 이는 내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부총장인 존 에치멘디John Etchemendy와 내가 생각한 성공의 가장 중요한 잣대는 우리 대학 학생, 교수, 직원의 역량이었다. 물론 이것은 새로 지은 시설이나 장학금 모금 액수 같은 단순한 수치에 비해 측정하기가 어렵다. 총장으로서 임기가 끝난 2016 8, 교수진과 학생의 수준을 가늠하는 대부분의 잣대(예를 들어 대학 순위, 선호도, 실적 등)에서 스탠퍼드는 전 세계 최고 대학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었다. 더불어 여러 학문 분야의 연구와 교육에서도 앞서 가고 있다…

나는 널리 알려진 리더십에 관한 많은 시각들과 매우 다른 점을 발견했다. 때로는 심지어 직관과 반대되기까지 했다. 효과적인 리더십에서 매우 중요한 서너 가지 측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력한 토대를 이루는 원칙들, 그런 원칙들을 착실하게 고수할 수 있는 일관성, 그리고 조직을 변모시키고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일련의 방법들이었다. 이 책의 처음 네 개 장에서는 ‘겸손humility’ ‘진정성authenticity’ ‘봉사service’ ‘공감empathy’이라는 토대가 되는 원칙들에 초점을 맞춘다. 이 중 일부는 봉사하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1과 연결된다. 내 생각에 이 네 가지 원칙은 조직을 변화시키는 리더십에서 특히 중요하다.

5장에서 다루는 ‘용기courage’는 이런 원칙들을 조직의 변화를 일구어 내는 구체적인 방법들과 연결시킨다. 용기는 훌륭한 리더의 특징이자 어려운 시기에 반드시 필요한 미덕이다. 리더가 힘든 상황에서도 본래의 경로를 지키게 해 주는 동시에, 필요할 때는 급히 경로를 바꾸게도 해 준다. 용기는 리더십의 토대를 이루는 원칙일 뿐 아니라 한 조직의 핵심 임무이기도 하다.

마지막 다섯 개 장은 혁신적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다시 말해 훌륭한 조직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내가 사용한 방법들을 다룬다. 우리가 스탠퍼드의 미래를 위해 어떻게 비전을 창조하고 대학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그 비전을 추구하는 데 참여하게 만들었는지 살펴본다. 각 장들은 ‘협업collaboration’ ‘혁신innovation’ ‘지적 호기심intellectual curiosity’ ‘스토리텔링storytelling’ 그리고 ‘유산legacy(오래도록 지속되는 창조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100년도 더 된 조직을 변모시키기 위해서는 모두를 감화시킬 수 있는 비전과 그 비전을 실현시키는 데 헌신하는 팀, 그리고 조직의 변모가 오래 유지될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어른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 존 헤네시 저 

"선교적 교회로 가는 길" 북클럽 인도자용 자료모음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09/blog-post_28.html

2023년 9월 17일 일요일

"하나님 나라의 도전" 북클럽 인도자용 자료모음 & 참여자 준비 자료 예시

  


* 인도자용 자료

* 새로운 크리스천 북클럽을 시작하며 with "하나님 나라의 도전"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9/with.html

* 하나님 나라의 도전 (1) - 프롤로그 & 깨어진 세상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09/1.html

* 하나님 나라의 도전 (2) - 자기 중심성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09/2.html

* 하나님 나라의 도전 (3) - 회복의 길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09/3.html

* 하나님 나라의 도전 (4) - 메시아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10/4.html

* 하나님 나라의 도전 (5) - 하나님 나라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10/5.html

* 하나님 나라의 도전 (6) - 온전한 복음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10/6.html

* 하나님 나라의 도전 (7) - 진정한 회심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10/7.html

* 하나님 나라의 도전 (8) - 새로운 공동체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11/8.html

* 마00 권사님, 하나님 나라의 도전 북클럽 모임 전 준비 & 평가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11/oo.html

* 최00 성도님, 하나님 나라의 도전 북클럽 모임 전 준비 & 평가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11/00_9.html

* 유00 권사님, 하나님 나라의 도전 북클럽 소감문 & 평가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11/00.html

* 나는 오늘도 "하나님의 꿈"을 꾼다
by "하나님 나라의 도전" 북클럽을 마치며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11/by.html


* 참여자 준비 자료 예시

* 마00 권사님, 하나님 나라의 도전 북클럽 모임 전 준비 & 평가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11/oo.html

* 최00 성도님, 하나님 나라의 도전 북클럽 모임 전 준비 & 평가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11/00_9.html

* 유00 권사님, 하나님 나라의 도전 북클럽 소감문 & 평가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11/00.html

하나님 나라의 도전 (2) - 자기 중심성

 


1. 요약

인간이 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가? 문제의 원인을 보아야 한다. 인간의 본성이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이 인류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이 침해되거나 더 큰 이익을 얻고 싶을 때에 야만성을 드러낸다. 이런 세상에서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는 약자들은 피해를 본다. 그들의 눈물이 끊이지 않는다. 경쟁적인 세상이기에 강자조차 더 강한 자가 되기 원하며 약자를 돌아보지 않는다.

놀랍게도 성경의 하나님은 자기를 알리실 때에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들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별볼일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다. 과부와 고아는 사회에서 가장 약한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약자가 노력하지 않고 게을러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대개는 불의한 세상과 구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하나님은 약자의 하나님이시며, 약육강식을 싫어하신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그러게 돌아간다. 이유는 무엇인가? 온 우주와 인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몰아내고 그 중심에 자신을 놓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기에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소유이다. 인간은 지정의를 바탕으로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경영하도록 위임 받았다.

그러나 인간은 중심에 계셔야 하는 하나님을 제거해버렸다. 생명의 근원이자 왕이신 하나님을 버렸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할 유사 신과 유사 왕을 붙들었다. 그러나 하나님 외에 어떤 존재도 인간에게 생명을 주지 못한다. 하나님을 제거한 상태로는 인간의 본질적 질문들은 결코 답을 찾을 수 없다. 또한 어려움을 당한 자들의 사정을 돌아보지 않게 된다. 유사 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믿는다면, 하나님은 신경 안정제 이상이 될 수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것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2. 책에서 한마디

약자의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의 약자와 소수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사회구성원으로서 그들이 갖는 권리를 지켜 주는 것이 마땅하다하나님을 믿는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하나님을 왕으로 믿고 진정으로 따르는 것은 다르다.”

 

3. 성경적 관점에서 보기

창세기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26 Then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in our likeness, and let them rule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air, over the livestock, over all the earth, and over all the creatures that move along the ground."

1:27 The term image of God can be seen as describing the ways in which man is different from all other created beings. It describes how humans resemble God in their ability to think, to communicate, to understand right and wrong, to be creative, and to experience relationships with God and with one another.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용어는, 인간이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고, 의사 소통을 하고, 옳고 그름을 이해하고, 창조적이며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경험하는 능력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닮았는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J. I. Packer, Wayne Grudem, and Ajith Fernando, eds., ESV Global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2012), 38.

출애굽기 22: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2:22 "Do not take advantage of a widow or an orphan.  22: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22:23 If you do and they cry out to me, I will certainly hear their cry. 22:24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22:24 My anger will be aroused, and I will kill you with the sword; your wives will become widows and your children fatherless.

22:21 you were aliens The memory of 400 years of slavery is often the given rationale for obeying the word of Yahweh (e.g., 20:2; Deut 5:15). Israel is not to oppress, because it too was oppressed. The memory of bondage in Egypt continues to play an active role in Jewish tradition, especially in the celebration of Passover (Exod 12–13). 너는 나그네였음이라 : 400년간의 노예 생활에 대한 기억은 종종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근거로 제시됩니다. 이스라엘도 압제를 받았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압제하면 안됩니다. 이집트에서의 속박에 대한 기억은 계속적으로 특히 유월절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2:22–24 These verses echo the story of the exodus out of Egypt and the punishment of Pharaoh’s armies. When the cries of the oppressed reached God’s ears, He acted, and began a series of events that led to the suffering of Egypt (2:23–25; 3:7–8; 7:14–15:21). The same fate is promised to those who oppress the most vulnerable in society—the fatherless and the widow. 구절은 애굽에서 탈출하는 이야기와 파라오의 군대가 받는 형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억압받는 자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의 귀에 들렸을 , 하나님께서는 행동하시고 이집트에 고통을 내리시는 일련의 사건들을 시작하셨습니다.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는 이들에게도 동일한 운명이 내려질 것입니다.

John D. Barry, Douglas Mangum, Derek R. Brown,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6), Ex 22:21.

예레미야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개역개정) 2:13 "My people have committed two sins: They have forsaken me, the spring of living water, and have dug their own cisterns, broken cisterns that cannot hold water. (NIV)

2:13 forsaken me, the … living water … dug their own cisterns. In abandoning the Lord, Israel abandoned the source of “living” (i.e., running) water in favor of stagnant “cisterns” that could not even hold the water that was put in them. In other words, they exchanged the source of true life and peace for empty and deceptive promises, which is all that idols can give. 여호와를 버리면서 이스라엘은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안에 부어진 조차 담고 있을 없는 웅덩이를 선택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참된 생명과 평화의 근원을우상이 주는 전부에 불과한 공허하고 기만적인 약속과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D. A. Carson, ed.,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1292.


4. RCB 관점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깊게 성찰하지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자신의 거친 말과 태도를 혐오하면서도, 깨어진 관계에 괴로워하면서도, 그리고 삶의 허망함에 몸서리치면서도 정작 그것의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깊이 돌아보지 않는다. 이 책의 탁월한 점은 문제의 증상이 아니라 그 본질을 향해 파고 들어간다는 점이다. 문제의 원인은 단 한가지이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의 자기 중심성이다.

김형국 목사님은 글을 풀어내는 실력이 탁월하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 그리고 약자와 동행하지 않는 교회의 아픈 현재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이분의 장점은 약자를 향한 진실한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분은 자신이 믿는 바를 실천하기 위해서 실제로 부단히 힘쓰는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충분히 존경 받을 자격이 있다.

또 한편으로는 논리적 우선 순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예민한 부분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신 이유가, 단순히 그들이 약자였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약자는 모두 보호받아야 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서 성경에서 분명히 죄라고 선언한 성적 소수자들 역시 약자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무조건 보호 받아야만 하는 대상이 되는 것인가? 오히려 약자를 품으시는 하나님이라는 프레임으로 하나님을 한정 지음으로, 죄를 미워하시고 그것을 벌하셔야 하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왜곡하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탄식을 들으셨다. 그러나 그들이 단순히 약자였기 때문에 구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신 것이다(2:24-25).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교회는 마땅히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며 마땅히 연약한 자들을 돕고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의 강자 약자 모두가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죄 사함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형국 목사님이 스스로 이야기한 것처럼, 강자는 절대로 자신을 강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강자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당신이 강자가 아니라고 혹은 당신이 자기 중심적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자체가 과연 어떤 긍정적인 영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회심을 가져올 수 있는가?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의 죄에서 시작한 인류 타락의 역사를 단지 강자와 약자의 프레임만으로 축소시켜서는 안된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성경적인 세계관을 붙들고 고수해야 한다. ‘액체 근대의 시대에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성경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야 한다. 강자이든 약자이든 자신이 자기 중심성에 빠진 하나님께 대적한 끔찍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다

루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교회가 약자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볼 때에 불완전한 피조물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매 순간 내가 하나님 앞에 반역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제서야 하나님의 그 깊은 은혜를 발견하며 지속적으로 자기 중심성과 싸울 수 있다. 그리고 그제서야 자신이 대하는 그 어떤 약자라도 진정한 긍휼과 사랑으로 품고 도울 수 있을 것이다.


5. 적용

1) 나 자신은, 세상의 약자들을 향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실천을 하고 있습니까?

2) 우리 교회는, 세상의 약자들을 향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실천을 하고 있습니까?

 

* 추가적으로 읽어볼 자료

- 인간은 혼란 속에 있고, 자칭 전문가를 따라가는데 여념이 없다는 측면에서

사람들은 오늘날과 같은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 속에서 무언가 붙잡을 만한 것을 찾느라 필사적이다. 액체 근대는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으로 추종하기로 문화적으로 합의된 모델이나 참조할 만한 기준이 없는 혼란스러운 역사적 시기를 뜻한다.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폭우가 몰아치는 바다로 우리를 몰아넣는 시기다. …

시간의 검증을 거친 전문가를 찾아라. 자칭, 타칭 전문가라 주장하는 사람들을 경계하라. 연구 결과를 보여줘야 하는 자연 과학(물리학, 수학, 화학)에서 전문가가 모방적으로 선택될 가능성은 적다. 그러나 단지 책 한 권을 출간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룻밤 사이에 ‘생산성’ 전문가가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핵심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것을 믿고 싶어 하는지에 상관없이 우리가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있도록 지식의 원천을 조심스럽게 큐레이션하는 데에 달려 있다.

너 자신의 이유로 살라 | 루크 버기스, 최지희 저

- 회개라는 것은 결코 자기 중심적인 인간의 개선 정도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그렇다면 인간이 빠져 있는 ‘곤경’이란 어떤 것일까요? 스스로 독립적인 위치에 서려고 한 것, 스스로 자기의 주인인 양 행세하려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타락한 인간은 개선의 필요가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니라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역자입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면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 그 동안 잘못된 길을 걸어 왔음을 깨닫고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는 것, 이것이 이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렇게 항복하는 과정—전속력을 다해 뒤로 도는 동작—을 그리스도인들은 ‘회개’라고 부릅니다. 회개는 장난 삼아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히 굴욕을 감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수천 년 간 익혀 온 자기 만족과 자기 의지를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의 일부를 죽이는 것, 일종의 죽음을 겪는 것을 뜻합니다.

순전한 기독교 | C. S. 루이스, 이종태, 장경철 저

"하나님 나라의 도전" 북클럽 인도자용 자료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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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학교 (1) - 아빠 하나님

  1. 요약 부모는 , 자녀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열망과 갈급함에 영향을 준다 . 또한 자녀를 양육하는 것 역시 , 부모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열망과 갈급함을 자라게 한다 . 자녀 양육은 부모의 성장에 중요한 통로이다 .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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