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약
예수님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집중적으로 가르치셨다.
교회에 대한 직접 가르침은 두 번 정도에 불과하다. 첫째로, 마태복음 16장인데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 위에 주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둘째로, 마태복음 18장인데 거기에서 교회는 하나님 백성의 모임을 의미한다.
이 외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수도 없이 가르치셨으며 복음 선포의 주제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에게 여전히 혼란스러운 하늘 나라 혹은 천국이라는 것은,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통치적 개념임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교회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집중해서 가르치셨지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보다 교회에 집중하고 있다. 교회 중심으로 살고 교회 문화를 배워 익히도록 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백성이 초림과 재림 사이에 어떻게 자신의 분야에서 살아야 할지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두가지
주요 원인으로 인해 가나안 성도들 그리고 교회의 신뢰도 추락이 일어났다. 첫째 교회 성장을 하나님 나라
확장과 동일시했고, 둘째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일종의 영적 공간으로 가르친 것이다.
교회가 규모가 커진다고
해서 반드시 그 지역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가 많아도 자신의 생존과 만족만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그것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결코 연결할 수 없다. 오히려 교회가 하나님의 왕권을 존중하며
복음으로 지역 사회 가운데 아름다운 변화를 일으켜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확장이다. 마치 메시아로 인해서
구원과 화평이 찾아오는 것처럼, 지역 사회에 전해지는 복음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그리고 마을 안에서의
수평적인 화평까지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며
교회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나님 나라는 첫째, 하나님의
통치가 인정되고 실행되는 영역이다. 또한 지금 여기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모시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둘째, 회개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겸손히 받아들이고 들어가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 일어난다.
셋째, 교회의 증거를 통해 선포되고 드러난다.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구속 은혜를 보여주는 표지, 도구, 그리고 맛보기라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보여주는 표지이며,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이 땅에 드러나도록
쓰임 받는 매개체이며,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보도록 하는 곳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사람들을 형벌에서 구원해 주신 기쁜 소식이다. 그러나 결코 이것은 다가 아니며 시작에 불과하다. 복음이 기쁜 소식인 이유는, 이제는 죄악 된 인간이 아니라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통치 아래에서 개인의 영혼,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창조 세계의 회복까지 일어나는 것이다. 한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기 위한 시작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삶의 현장에서 나타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
관점을 상실하면 생존을 위해 제도권에 갇힌다. 소외된 이들을 더 이상 찾아가지 않고 오히려 교회를 채우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교회와 세상을 구분함으로 예배가 이루어지는 영역만 거룩하다고 가르친다. 또한 세상을 섬겨야 할 성도가 영적 소비자로 전락한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교회는 안정기로 넘어가면 제도화의 길을 걷는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 교회 중심의 생활보다는 하나님 나라 중심의 생활이 되어야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 또한 지역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가정과, 마을, 그리고 지역 사회를
위한 결정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지금 이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2. 책에서 한마디
“우리는 물어야 한다. 예수님은 교회보다 하나님의 나라(천국)를 집중해서 가르치셨는데, 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보다 교회에 집중하고
있는가?”
3. 성경적 관점에서
보기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9:9 Rejoice
greatly, O Daughter of Zion! Shout, Daughter of Jerusalem! See, your king comes
to you, righteous and having salvation, gentle and riding on a donkey, on a
colt, the foal of a donkey. 9: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9:10 I will take away the
chariots from Ephraim and the war-horses from Jerusalem, and the battle bow
will be broken. He will proclaim peace to the nations. His rule will extend
from sea to sea and from the River to the ends of the earth.
9:10 peace to the nations. In sharp contrast to Alexander’s empire, which was founded on bloodshed, the Messianic King will establish a universal and eternal kingdom of peace as the ultimate fulfillment of the Abrahamic covenant (cf. 14:16; see Ge 12:2–3 and note, but cf. Rev 19:11 and note). 많은 이들의 피 위에 세워진 알렉산더의 제국과는 정반대로, 메시아 왕은 아브라함 언약의 궁극적인 성취로서 보편적이고 영원한 평화의 왕국을 세울 것입니다.
Kenneth L. Barker, ed., NIV Study Bible,
Fully Revised Editi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20), 1601.
9:9, 10 The two advents of Christ are here compressed as though they were one as in Is 61:1–3 (cf. Lk 4:16, 21). Actually, v. 9 refers to His first coming and v. 10 is His second. OT prophets didn’t see the great time period between the two comings. The church age was a “mystery” hidden from them (cf. Eph 3:1–9; Col 1:27). 이 9절과 10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두 번의 강림이 마치 하나처럼 압축되어 있습니다. 사실 9절은 그분의 첫 번째 오심을 말하고, 10절은 그분의 두 번째 오심을 가리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두 번의 강림 사이의 위대한 기간을 보지 못했습니다. 교회 시대는 그들에게 숨겨진 “비밀”이었습니다. => 초림과 재림의 사건으로 이해하는 성경 해석과 저자의 해석은 어느 쪽이 더 성경적으로 우세한가?
John F. MacArthur Jr., The MacArthur Study
Bible: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hville, TN: Thomas
Nelson Publishers, 2006), Zec 9:9.
누가복음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23:43 Jesus answered him, "I tell you the truth,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23:43 Verily. Truly. To day. Though just converted from a life of sin and blasphemy, this man did not have to wait until after ages of purgatory or unconsciousness but immediately upon his death joined Christ in glory. paradise. A word for a beautiful garden, used here of the heavenly realm where pardoned souls are gathered after death like a return to the garden of Eden (2 Cor. 12:4; Rev. 2:7; cf. Rev. 22:1–3). 진실로. 진실로. 오늘도. 죄와 신성 모독의 삶에서 막 회심했지만, 이 사람은 오랜 연옥이나 무의식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고, 죽자마자 영광 가운데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습니다. 낙원: 아름다운 동산을 뜻하는 단어로,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죽음 후에 용서받은 영혼들이 모이는 천상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1503.
마태복음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13:44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treasure hidden in a field. When a man found it, he hid it
again, and then in his joy went and sold all he had and bought that field.
13:44–46 Those who discover and recognize the worth of living life under the rule of God will sacrifice anything of earthly value for participation in his kingdom.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사는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왕국에 참여하기 위해 세상적인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희생할 것입니다.
Tony Evans, The Tony Evans
Study Bible (Nashville, TN: Holman Bible, 2019), 1115.
사도행전 8: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8:12 But when they believed Philip as he preached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and the name of Jesus Christ, they were baptized, both
men and women.
8:12–13 Philip’s message and signs attracted the attention even of Simon. His interest appears to have been in the miraculous aspect of Philip’s ministry more than in the message of the kingdom of God, which he preached. 빌립의 메시지와 표적은 심지어 시몬의 관심까지 끌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빌립이 전파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보다, 그의 사역의 기적적인 측면에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
Lyman Coleman, 편집자, Life Connections
Study Bible (Nashville, TN: Holman Bibles, 2019), 1764.
이사야 52: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개역개정) 52:7 How beautiful on the mountains are the feet of those who bring good news, who proclaim peace, who bring good tidings, who proclaim salvation, who say to Zion, "Your God reigns!" (NIV)
52:7 In the ancient world, news was carried by a herald. In this verse the herald announces the end of hostilities and the fact that God reigns as King over his people. A variation of this verse occurs in Nah 1:15. Paul quotes this verse in Rm 10:15. 고대에는 전령이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전령은 적대 행위가 종식되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왕으로서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Tremper Longman III, “Isaiah,” in CSB
Study Bible: Notes, ed. Edwin A. Blum and Trevin Wax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1118.
4. RCB의 관점으로
이 챕터는 마치 코페르니쿠스의 혁명과 같은 사고의 전환을 가져다 준다. 저자의 탁월한 점은, 단순히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했다는 것이 아니다. 현대 교회가 성경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무엇을 지나치게 혹은 비성경적으로 강조하였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저자는 매우 진지하게 질문한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보다 교회에 집중하고 있는가?”
교회에 집중하는 것은, 언뜻 보면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인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소중히 여기고 아낀다는데 누가 감히 뭐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여기에서 아이러니가 등장한다. 예수님 자신이 실제로 이 땅에서의 삶의 대부분 가운데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강조하시고 가르치셨는데
왜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저자와 함께 하는 진지한 성찰 앞에서,
드디어 우리의 아픈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성경적 회복이 없다면, 사실상
기독교의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가 없는데 우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외치는 것이 무슨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고 있는
자신의 현실에 대한 직시와 참된 회개가 없는데 어떻게 교회가 변하겠는가?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하는데, 교회 자체의 세력을 불리는 것에 모든 힘을 쏟고 있다면 그것이 도대체 세상의 친목 동호회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이단이 극단적인 도피주의이며 성경을 개인적인 문서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통찰력 있는 지적이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삶의 내용이라는 면에서는 얼마든지 우리는 이단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교회가 안정기로 넘어가면 제도화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매우 뼈아픈 지적이다. 그렇다면 공동체를 회복시키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하나이다. 다시 하나님의
나라의 메시지를 새롭게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성도들에게 실현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실제를 성도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훈련하고 그 결과물들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논리의 아쉬운 점이 보인다. 저자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제대로 갖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하며 이제는 교회 중심의 생활보다는 하나님 나라 중심의
생활이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공부 잘해라 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리고 공부를 잘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없겠는가? 문제는 공부를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하며, 공부를 어떻게 잘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저자의 주장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교회 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야 한다라는 저자의 주장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나아가서 저자가 분석한 원인 즉, 하나님의 백성이 초림과 재림 사이에 어떻게 자신의 분야에서 살아야 할지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원대한
비전을 이루는 것은 매우 복합적인 것이다. 성도로서 지적이며 정서적인 성숙, 기본적인 성경의 이해와 삶의 견고한 연결,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제공하는 지혜와 격려가 반드시 필요하다. 과연 이 책은
그러한 원대한 비전과 훈련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들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크리스천 북클럽이야 말로
이것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안이 아닌가?
5. 적용
1) 당신의
신앙 생활은 당신이 출석하는 교회 중심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 중심입니까?
2) 하나님
나라 중심의 신앙 생활을 위해서 당신에게 가장 시급히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선교적 교회로 가는 길" 북클럽 인도자용 자료모음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09/blog-post_2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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