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약
성경의 메시지는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이야기가 바로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면서 그 반응으로 회개를 요구하신다. 회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깨닫고, 그리고 내 인생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나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가는 것이다.
그러나 방향 전환의 결단이 있어도 여전히 문제는 존재한다. 나의 결심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근본적 문제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방향 전환을 해도 하나님이 받아 주실 것인가 라는 문제이다. 하나님을 향해 돌아섰을 때에, 자신에게 내릴 심판이 먼저 보이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좋은 소식이 있으니 그 소식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지만, 오히려 사역의 정점에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돌아섰을 때 직면하게 되는 심판을 거두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기에 인간을 향한 심판을 자신의 아들에게 대신 지게 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완벽한 형태로 나타난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의 방식에 대하여 죽었다. 이제는 자기 중심적 삶과는 무관하게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의에 대해 살았는데, 그것은 이제 하나님 중심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정의를 이루신 십자가의 예수님 속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을 발견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먼지와 같은 자신에게 쏟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격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사랑을 받을 때에 변하며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 때문에 사람은 변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여셨고, 그분을 의지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이 너무 커서 그 큰 사랑이 처음부터 끝까지 지키실 것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을 들었을 때에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안 만큼 진실하게 반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복음을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반응이 믿음이다. 믿음은 내가 믿고 싶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은 자신의 자격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 수록 내면의 힘이 더 강해진다. 더욱 든든히 믿음으로 살 때에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서 회복되는 것이다. 깨지고 상한 세상을 회복하게 하려고,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시작하게 하시고 당신을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하려고 그리고 남은 인생이 쓰일 수 있게 하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도전에 당신은 어떻게 응답하겠는가?
2. 책에서 한마디
“우리는 자격이 없지만, 그가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켰으므로, 그를 의지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낼 자신이 없지만, 그의 사랑이 너무 커서 그 큰 사랑이 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키실 것을 믿는다… 들어갈 수도, 살아 낼 수도 없는 하나님 나라에 우리를 들어가게 한 것이 바로 ‘복음’이다.”
3. 성경적 관점에서 보기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10:45 For even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10:45 The greatest example of
servant leadership is the Son of Man. Giving is the essence of
servanthood, and Jesus ga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cp.
Is 53:10–12). “Ransom” refers to the price paid to
release a slave. The words of v. 45 are crucial to Jesus’s self-understanding of his
death. 섬기는 리더십의 가장 위대한 모범은 인자입니다. 베푸는 것이 섬김의 본질이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대속물”이란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지불하는 대가를 말합니다. 45절의 말씀은 그분의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 이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Ross H. McLaren, “Mark”, in CSB Study Bible: Notes, ed.
Edwin A. Blum와/과Trevin Wax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1579.
베드로전서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24 He himself bore our sins in
his body on the tree, so that we might die to sins and live for righteousness;
by his wounds you have been healed.
2:24 When a person is dead
to someone or something, it means any connection between the two is
broken. Jesus died so that we would want to have nothing to do with sin
anymore, but instead be devoted to doing what God has declared is right (righteousness). 사람이 누군가 또는 무언가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둘 사이의 모든 연결이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더 이상 죄와 상관없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옳다고 선언하신 것(의)를 행하는 데 헌신하기를 원하셔서 죽으셨습니다.
The Wartburg Project, Holy
Bible: Evangelical Heritage Version Study Bible (Midland, MI:
Northwestern Publishing House; Wartburg Project, 2019), 벧전 2:23.
2:24 who Himself bore our sins: The Greek wording
emphasizes Jesus’
personal involvement in the act of paying the price for our sins. It also
emphasizes that it is our sins that Jesus bore on the Cross. The tree is
the Cross. that we . . . might live for righteousness: The
purpose of Christ’s
bearing our sins is that we might live to please Him.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 여기에서 헬라어 표현은,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르시는 행동에서 예수님의 개인적인 참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지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것은, 우리가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Earl D. Radmacher, Ronald Barclay
Allen와/과H. Wayne House, The
Nelson Study Bible: New King James Version (Nashville: T. Nelson
Publishers, 1997), 벧전 2:24.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17 For in the gospel a
righteousness from God is revealed,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just as it is written: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1:17 righteousness of God. This is a key phrase in Romans
(3:21; 5:19; 10:3), regularly explained in the letter as “righteousness … through (or of) faith” (3:22; cf. 9:30; 10:6). It
refers to the righteousness of Christ that is reckoned, accounted, or imputed
to the one who believes. This imputation of righteousness to sinners who
believe is fully consistent with the personal righteousness of God (cf. 3:25,
26). As a just and righteous judge (2:5–16), God on the merit of the obedience and death of His Son
alone justifies, or declares righteous, sinners through true faith in Christ
and not through anything that they have done, are doing, or will do (3:21–26; 5:10). Luther’s reading of this verse had a
decisive impact on his understanding of justification. 하나님의 의 : 이것은 로마서의 핵심 구문이며, “믿음으로 말미암아…의”라는 표현으로 자주 설명됩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의 것으로 여겨지는, 또는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에게 이렇게 의를 전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온전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공정하고 의로운 재판장으로서, 하나님은 오직 자기 아들의 순종과 죽음의 공로에 따라 죄인을 의롭다 칭하시거나 또는 선언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행했거나 행하고 있거나 행할 그 어떤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을 통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어구에 대한 루터의 독법은 칭의에 대한 그의 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from faith for faith. The righteousness of
justification is received exclusively through faith, not works, so it comes to
all those with faith, whatever their race.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 칭의의 의는 선행이 아니라 오로지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의는 사람의 혈통이나 인정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든지 주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as it is written. Hab. 2:4 provides the biblical
basis for and the summary of what follows, indicating that the way of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was already known in the OT. 기록된 바 : 하박국 2장 4절은 다음에 이어질 내용들에 대한 성경적 근거와 요약을 제공합니다. 따라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하심을 얻는 방식이 이미 구약에서도 알려진 바 되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shall live. The whole of the Christian
life, from beginning to end, is lived in trust and dependence on the God who
graciously justifies the sinner.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처음 시작에서부터 마지막 최후에 이르기까지, 죄인을 은혜로이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의존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R. C. Sproul, 편집자, The
Reformation Stud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2015 Edition) (Orlando,
FL: Reformation Trust, 2015), 1979.
로마서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1:20 For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God's invisible qualities--his eternal power and divine nature--have
been clearly seen, being understood from what has been made, so that men are
without excuse.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1:21 For although they knew God, they neither glorified him as
God nor gave thanks to him, but their thinking became futile and their foolish
hearts were darkened.
1:19 God as Creator has
disclosed himself in creation. “The heavens declare the glory of God, and the expanse proclaims
the work of his hands”
(Ps 19:1; cp. Ac 14:15–17).
People also have an innate capacity for God as well as a moral conscience. God
is at work to show himself in the world, yet the world is in rebellion against
him.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창조물들 안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편 19편1절). 사람들은 도덕적인 양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타고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에게 대항하여 반역하고 있습니다.
1:20 Humanity’s problem is not that they don’t know the truth. The history of
the human race discloses a determined effort to oppose the will of God. People
are without excuse for their idolatry and practical atheism. 인류의 문제는 그들이 진리를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는 단호한 노력을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우상 숭배와 실질적인 무신론에 대하여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Edwin A. Blum, “Romans”, in CSB Study Bible:
Notes, ed. Edwin A. Blum와/과Trevin Wax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1781.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개역개정) 5:8 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NIV)
5:6–8 The greatness of God’s love contrasts infinitely with
even the noblest acts of love that are possible for the natural man, for it is
revealed in the voluntary death of the best, Jesus Christ, for the worst (Gal.
2:20; Eph. 5:25; 1 John 4:9–10).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은, 심지어 보통의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사랑의 행위와 무한히 대조됩니다. 왜냐하면 가장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최악의 인간들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와/과Gerald M. Bilkes, 편집자,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1622.
4. RCB의 관점으로
성경은 인간의 현실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어렴풋이 그러나 부인하지 못할 만큼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고 나 중심적인 삶을 살아간다 라는 표현으로는 인간의 현실을 충분히 묘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대적하고 있으며, 이제는 오직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악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에게 “당신 중심적인 삶에서 이제는 돌이키라” 라는 표현은 여전히 아쉬움이 있다. 이제는 “말씀을 듣고 반응해야 한다” 라고 표현하는 것도 아쉬움이 있다. 어쩌면, “이제 당신이 반응해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여전히 기독교 신앙을 “나” 중심적으로 이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돌아섰기에, 이제는 내가 다시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이라고 기독교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설명은, 당신의 힘으로 낙원으로 들어가라는 말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이시다. 저자는 온전한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하여 거의 처음으로 심도 있게 설명한다. 핵심은, 당신은 반응하는 믿음으로 구원 받았으며 하나님은 당신을 극진히 사랑하시기에 당신은 이제 안심해도 된다는 것이다. 복음에 대한 좋은 설명이지만, 책의 중반부까지 하나님에 대한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초점을 강하게 맞추다가, 이제 갑자기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의지가 약해도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라고 설명하기에 전체적인 흐름에서의 논리적인 연결점이 약해 보인다.
저자는 우리가 선한 일을 노력하고 행하지만 여전히 부족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괜찮다 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그 사랑은 과연 어떤 것인가? 우리가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저 눈을 감아주는 하나님이신가? 그러므로 온전한 복음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설명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그리고 평생동안 여전히 그의 수준은 죄인에 불과하다.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반응할 수 없으며 평생 하나님의 대적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전적인 죄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성경은 심지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선택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너무나 놀라운 선언이며 인간 편에서는 충격 그 자체이다.
때가 되어 인간 편에서 그 어떤 행위나 반응이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인간에게 찾아오신다. 그리하여 그 어떤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의로운 자들이라 칭함을 받는다.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히 용납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의 구원은 보장 받는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보수적인 신앙은 인간의 의지를 축소시키며, 열심을 내지 않는 신앙으로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 말씀에 따라, 우리 속에 선한 일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심을 선언한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께서 선을 행할 의지를 주시며,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강한 노력조차 성도에게 허락하신다고 말한다.
칼빈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에서 인간의 반응과 열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여호와가 가지신 그 어떤 것도 빼앗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우리 안에 일어나는 그 모든 것, 심지어 나의 의지의 반응조차도 오직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며, 그렇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을 겸허하게 만들고, 겸손하게 만들고, 감동시키고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고 경험하고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이다.
나의 인생을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성경적인 틀은, 단순히 나의 반응과 나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이루시는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 그리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완전한 의와 그 의의 나에 대한 전가를 성경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우리는 평생동안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더 믿고, 의지하고, 그분께만 찬양을 돌려야 한다.
5. 적용
1) 처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뿐만 아니라 평생동안 하나님과 말씀을 향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신이 하나님을 더욱 믿어야 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2) 예수님께서 쏟으신 십자가의 극진한 사랑을 항상 묵상하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자주 묵상하기 위해서 당신은 언제 어떻게 어떤 방법을 사용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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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 하심과 인간의 선행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이해하는 측면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63년에 작성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개혁주의 교리와 신학에 대한 포괄적인 가르침을 제공하는 신앙고백서입니다. 전통적으로 신학자 자카리우스 우르시누스와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에 의해 작성된 이 질문과 답변은 52개의 주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래는 일 년 중 매주 일요일에 가르치기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From
Reformed Church in America Webpage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0문. 어떻게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됩니까?
대답.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으로만
[의롭게 됩니다]. 이것은, 비록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크게 어겼고 단 하나도 지키지 않았으며 여전히 모든 악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나의 양심이 고소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공로가 전혀 없이 순전히 은혜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와 의와 거룩을(=그리스도의 완전히 만족하게 하심과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거저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오직 믿는 마음으로 이 선물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치 나에게 죄가 전혀 없고 또한 내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실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을 내가 직접 이룬 것처럼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61문. 왜 당신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까?
대답. 그것은 나의 믿음에 어떤 가치가 있어서 내가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와 의와 거룩만이(=그리스도의 완전히 만족하게 하심과 의로우심과 거룩하심만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가 되고,
오직 믿음으로만 나는 이러한 의를 받아들여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62문. 하지만 왜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 의나 의의 한 부분이 될 수 없습니까?
대답. 왜냐하면 의가 만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하며 하나님의 율법에 완벽하게 일치해야 하는데, 우리가 금생에서 [행한] 최고의 행위조차도 모두 불완전하며 죄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63문.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에 대해 금생과 내생(來生)에서 상을 베푸실 것이라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행은 아무것도 획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대답. 이러한 상은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64문. 하지만 이러한 가르침은 사람들을 경거망동하고 방종하도록 만들지 않겠습니까?
대답.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이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사람들이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임경근, 교리와 함께 하는 365 가정예배, 개정판. (서울시 마포구 양화로 78, 502호: 세움북스, 2017), 391–392.
선행의 첫 부분은 의지이며, 나머지 부분은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강한 노력인데, 이 두 가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지에 대해서나 그것을 이루려는 노력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우리 것으로 주장하게 되면, 그것은 여호와의 것을 빼앗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의지를 도우신다고 말하면, 결국 무언가가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지를 만드신다고 말하면, 우리의 의지 속에 있는 모든 선한 것들이 다 우리 바깥에서 비롯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한 의지라 할지라도 우리 육체의 짐 때문에 눌려서 일어설 수가 없으므로,
사도는 그런 어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우리에게 끊임없는 열심이 충족하게 베풀어진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참조.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역자주).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가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말씀 —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고전 12:6) — 도 사실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진술은 영적 생명의 전 과정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라고 간구한 다음,
곧바로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 86:11; 참조. 시 119:33)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 말씀은 곧, 아무리 좋은 기질을 지닌 사람이라도 수많은 요인들로 인하여 산란해져 있기 때문에, 끝까지 인내하도록 힘을 얻지 못하면 곧바로 무너지고 타락하고 만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다른 곳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도록 발걸음을 주장해달라고 기도한 후에,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시 119:133).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렇게 하여 우리 속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시고 또한 완성하시는 것이다. 의지가 올바른 것에 대한 사랑을 품고, 그것을 향하여 열심을 기울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움직이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행하심인 것이다. 선택과 열심과 노력이 흔들리지 않고 그것을 이루도록 끝까지 나아가는 것이 바로 주님의 행하심이요, 또한 사람이 이런 일들에서 끊임없이 전진하며, 끝까지 인내하는 것도 주님의 행하심인 것이다.
기독교강요 (상) - 1559년 최종판 | 장 칼뱅, 원광연 저
-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의의 전가에 대한 이해의 측면에서
케빈 드영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격렬한 지진이 났을 때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죄수들은 달아났고,
잠에서 깬 간수는 모든 죄수가 달아난 것을 보고 크게 낙담했다. 간수가 자살하려는 순간, 바울이 그를 막았다. 그러자 간수가 다음과 같은 유명한 질문을 던졌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30절). 그러자 바울은 그에게 간단하면서도 성경적이며, 굉장히 아름다운 답변을 내놓는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31절).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이생과 내생에서 이보다 중요한 질문은 없다.
이 질문에 대한 이 교리문답의 대답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즉 구원받는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믿음으로 구원하시는지를 잘 요약해 놓았다.
이 요약된 대답에는 두 개의 핵심 단어가 있다. 첫째, 가장 처음에 나오는 단어인 “오직”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잘 알겠지만,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다지 논란거리가 아니다. 사람들은 믿음에 관심이 많고, 또한 무언가를 믿고 있다. 하지만 오직 믿음이다. 믿음에 무엇을 더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에 당신의 배경을 더해야 하거나, 믿음에 당신의 출신 가문을 더해야 하거나, 사회 정의를 위해 행한 선한 일들을 더해야 하거나,
당신이 얼마나 자주 기도하는지를 더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믿음에는 대상이 있다.
많은 사람이 계속해서 믿음과 신앙을 감상적으로 덧칠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믿음의 사람이야.” “너도 믿음을 가져야 해.” 하지만 믿음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다. 신앙이 굳건한 사람, 진실한 사람,
영적인 일에 신비한 믿음을 지닌 사람이 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 그분을 믿어야 한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의 대상인 것이다. 믿음은 그저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이 “흠, 너는 그다지 이룬 것이 없구나.
하지만 너에게는 믿음이 있으니 그건 정말 맘에 든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며 믿음을 하나의 선한 행위로 보시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 것이며, 그러고 나서야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신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다.
내가 자란 지역은 추운 곳이어서 종종 스케이트를 타거나 아이스하키 경기를 즐겼다. 첫 얼음이 얼면 발끝으로 그 위를 걸으며 궁금해했다. ‘얼음이 충분히 두껍게 얼었을까?’ 어떤 사람은 얼음에 대한 믿음이 충분한지 자유롭게 스케이트를 타며 곳곳을 누볐다. 반면 내 믿음은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다니며 언제라도 얼음에서 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모두를 안전하게 지켜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의 정도가 아니다. 비록 자유롭게 다녀도 될 만큼 얼음이 얼었다고 아무리 확신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실제 얼음의 두께다.
당신이 서 있는 대상이 당신을 구원한다. 그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인 것이다.
둘째, 이 대답에는 굉장히 의미심장한 단어가 나온다. 바로 “전가”다. 그리스도의 의로운 삶이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믿음은 복음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전가란 우리도 그렇게 여겨진다는 뜻이다. 우리를 그렇게 인정한다는 뜻이다. 마치 돈을 전신으로 송금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 안에 있는 의(본래적 의, inherent
righteousness)와 우리 안에 주입된 의(주입된 의, infused
righteousness)는 다르다. 본래적 의는 다음과 같은 의에 가깝다. “자, 봐. 내가 얼마나 의로운지. 난 의로운 일을 했어.”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의는 이런 것이 아니다. 우리 외부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와 연합되어 예수의 의가 우리의 의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지만 악한 자를 의롭다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3장이 다루는 문제이자, 복음의 좋은 소식이다. 즉, 우리가 여전히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은 공의롭다. 그분이 마술 지팡이를 흔들면서 “죄는 큰 문제가 아니야(윙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면서도 우리를 의롭다고 하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복음 연합 and 리디머 장로교회, 뉴시티 교리문답 해설: 우리의 신앙을 굳건히 세워 줄 하나님의 진리,
ed. 콜린 한센, 초판. (서울: 죠이북스, 2018), 139–141.
- 하나님의 선택과 믿음의 관계의 측면에서
처음 논문에 나타나 있는 칼빈주의의 견해는 유명한 5세기 신학자 어거스틴과 바울의 로마서에 대한 그의 해석에까지 소급한다. 이러한 견해를 주장하였던 다른 유명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인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이 있다. 거기에 유명한 부흥설교가들인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등도 이 견해를 주장하였다. 오늘날 이 견해는 R. C. 스프룰(Sproul, 1939–)과 존 파이퍼(John Piper, 1946–) 등과 같은 복음주의 학자들에 의해 분명하게 표명되고 변호되고 있다. 이 견해의 핵심에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지혜와 주권 가운데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부터 죄 많은 인류로부터 일단의 사람들인 택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비롭게 선택하셨다는 확신이 있다.
그레고리 A. 보이드 and 폴 R. 에디, 복음주의 신학 논쟁: 복음주의 신학의 이슈 이해,
ed. 백승현, trans. 박찬호, 초판., vol. 9, 복음주의 역사 시리즈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64.
또한 알미니안주의가 사람들이 성령의 구원하시는 사역에 항복하거나 거부하거나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적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전적으로 은혜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한다. 그러나 만일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 사이의 차이가 전자는 성령에게 굴복하지만 후자는 굴복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구원받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더 낫다거나 아니면 최소한 덜 죄악되다는 결론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사람들의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또한 알미니안주의자들이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만일 사람들이 끊임없이 신앙을 산출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구원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면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낫다라는 결론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이처럼 알미니안주의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지켜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논리적이지 않다.
그레고리 A. 보이드 and 폴 R. 에디, 복음주의 신학 논쟁: 복음주의 신학의 이슈 이해, ed. 백승현, trans. 박찬호, 초판., vol. 9, 복음주의 역사 시리즈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71–272.
첫째,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도록 선택하라고 요구하신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이러한 선택이 사람들의 구원의 기초임을 부정한다. 사람들이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과 사람들이 믿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기 때문에 구원받는다. 만일 그들이 택자들이라면 그들은 믿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택자가 아니라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불신자들에게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47)라고 말씀하고 있다. 최초의 원인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자”인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인지 하는 것이다. 그다음 두 번째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하는 일이 발생한다.
둘째, 칼빈주의자들은 자유의지를 부정하지 않는다. 칼빈주의자들이 부정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이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함에 있어서 아담과 하와를 자유롭게 따라갔다. 이러한 반역의 결과는 인간이 이제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께 긍정적으로 반응하도록 선택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는 단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그들의 본성을 바꾸어 주시고 그들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가지게 하실 때에만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참조. 행 16:14).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고 말씀하신다
그레고리 A. 보이드 and 폴 R. 에디, 복음주의 신학 논쟁: 복음주의 신학의 이슈 이해,
ed. 백승현, trans. 박찬호, 초판., vol. 9, 복음주의 역사 시리즈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75–276.
* "하나님 나라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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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3/09/blog-pos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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