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약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림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며 유사 신을 찾아 헤매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계 회복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무엇인가?
인간은 이러한 자신의
근원적 문제 해결을 위해서 끊임 없이 절대적 진리나 구원 또는 깨달음을 찾는다. 첫째로 양심과 선행이다. 양심에 따라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이익에 반하거나 선을 행하는데 고통이 수반되면 그 양심이 무너지기 때문에, 부실한 양심과 선행에
의지해서 잃어버린 신을 찾는 것은 불가능이다. 둘째, 탐구와
연구이다. 인류는 본질적인 질문들을 하고 그 답을 찾아왔다. 이
답들은 어느 정도 통찰을 주지만 삶의 궁극적인 답을 주지 못하며 이기심으로 오염되어 있으며 지식과 삶은 여전히 괴리되어 있다.
셋째, 기도와 종교 행위이다. 인류는 신을 상정하고 종교적 행위를 실천했다. 그러나 인간의 종교 행위는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종교적 행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고 변함 없이 사랑하기를 원한다.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우주 밖에 존재하는 신을 만날 수 없고, 신을
내 마음대로 조작하려는 종교 행위를 통해서도 신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한 사람을 찾아가 인격적으로 반응할 기회를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찾아가시고 나를 믿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 없이 망가진 모든 민족을 회복시키시겠다
라고 말씀하신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다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그분을 따라갔다.
아브라함의 위대성은
그의 진실한 반응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기 위한 중요한 원리는, 깨달은 만큼 진실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라는 것은, 하나님께 인정 받고 그분과의 관계가 바로 섰다 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소중히 여기셨고 그 가치를 인정하셨다.
대다수 종교는 인간의
열심으로 신을 감동시키는 신심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믿음은 신심과는 다르다. 기독교의 믿음은 하나님에 관해 알고 깨달은 만큼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며, 그 상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 자신을 알려주실 때에 알게 된 만큼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며 전인격적으로 반응할 때에 관계가 발전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을 알고 따르고 사랑하며 진실하게 반응하는 믿음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깨달은 것에 대하여 인격적으로 반응할 때에 깨어진 개인과 세상이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믿고 그렇게 따라가는 것이므로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믿음이야
말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의 원리이며,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끌어 가시고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가 동참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2. 책에서 한마디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알아라. 나를 안 만큼 나를 따라라. 나를 알면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안 만큼 진실하게 내게 반응하는 것이 믿음이고, 이런
믿음을 볼 때 나는 기쁘다.”
3. 성경적 관점에서
보기
창세기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15:5 He took him outside and
said, "Look up at the heavens and count the stars--if indeed you can count
them." Then he said to him, "So shall your offspring be."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15:6 Abram believed the LORD, and he credited it to him as
righteousness.
15:1–6 In this chapter, we see for the
first time dialogue between the Lord and Abram. The childless Abram is fearful
about his future. He thinks that his servant, Eliezer of Damascus, will have to
be his surrogate heir (a practice common in the ancient world), but God
reassures him that he will in fact have his own children—as many as the stars.
Abram believes God’s word, throwing himself upon God’s promises. As a result of
Abram’s faith, God declares him righteous. Long before the Law of Moses, Abram
is righteous before God (Ro 4:1–3). 창세기 15장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를 봅니다. 자녀가 없는 아브라함은 자신의 미래를 두려워합니다. 그는
자신의 종인 다메섹 엘리에셀이 자신의 대리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별과 같이 많은 그 자신의 자녀를 갖게 될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의 약속에 자기 자신을 던졌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있기 오래
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였습니다. (로마서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Stephen Dempster, “Genesis,” in The NIV Grace and Truth Study Bible, ed.
R. Albert Mohler Jr. (Grand Rapids, MI: Zondervan, 2021), 22.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개역개정) 11:6 And without faith it is
impossible to please God, because anyone who comes to him must believe that he
exists and that he rewards those who earnestly seek him. (NIV)
11:6 impossible to please. Enoch pleased God because he had faith. Without such faith it is not possible for anyone to “walk with God” or “please Him” (cf. 10:38). He is. The emphasis here is on “He,” the true God. Genuine faith does not simply believe that a divine being exists, but that the God of Scripture is the only real and true God who exists. Not believing that God exists is equivalent to calling Him a liar (cf. 1Jn 5:10). rewarder. A person must believe not only that the true God exists, but also that He will reward men’s faith in Him with forgiveness and righteousness, because He has promised to do so (cf. 10:35; Ge 15:1; Dt 4:29; 1Ch 28:9; Ps 58:11; Is 40:10).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 : 에녹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과 동행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참 하나님이신 “그분” 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단순히 신적인 존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이 유일한 참되고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 것은, 그분을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상 주시는 이 : 사람은 참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분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용서와 의로움으로 그분을 믿는 사람들의 믿음에 보상을 주실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John F. MacArthur Jr., The MacArthur
Study Bible: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hville, TN: Thomas Nelson Publishers,
2006), Heb 11:6.
4. RCB의 관점으로
김형국 목사님의 글은 따뜻하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의 이미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분을 떠난 인간을 얼마나 기다리시는지를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저자는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한 인간의 다양한 시도들이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잘 설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챕터에서는 아쉬운 점은, 성경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이라는 것을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신뢰 정도”로 이해하였다는 것이다. 어쩌면 책의 초반이기 때문에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믿음의 반응이라는 측면을 더 드러내기 위하여 그렇게 설명하신 듯 하다.
저자는 마음을 다해 신에게 간구하는 신심과, 하나님에
관해 알고 깨달은 것에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믿음을 구별하면서 후자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며 성경적인 믿음이라고 설명한다. 일견 탁월한 설명 같지만, 이러한 관점으로만 믿음으로 이해한다면
인간의 반응이라는 측면에서는 이 두가지를 구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저자는 신심과 믿음의 반응을
애써 동일선상에 놓고 싶어하지 않지만, 그러나 인간의 열심이라는 것에는 기준이 없기 때문에 결국 잘
모르는 신을 열심히 믿고 착하게 살든지, 혹은 하나님을 잘 믿고 착하게 살든지의 기준으로 밖에 기독교의
차이점을 설명해내지 못한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내가
믿음으로 반응하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다” 라고 주장한다면, “도대체
얼만큼 반응하면” 인정을 받는다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죄
사함과 그분이 주시는 완전한 의로움이 약화된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 빼 버린다면, 기독교는 사실상 타
종교와 다를 바 없는 것이 된다. 그저, 열심히 믿으면 인정
받는 인과응보의 종교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했다 라고 말씀하신다 (롬3:23).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나님에게 반응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반응이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의로움이라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을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 의 문제가 아니라 로마서 4장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가 하나님을 믿은 것이 그의 의로움이 되었고, 요한복음 8장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고 믿었던 아브라함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프로울과 같은 보수적인 신학자도 믿음과 순종이 나란히 가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는 심지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음으로 겁쟁이가 되어버린 현대 교회를 질타한다. 그러나 그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믿음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를 믿은 자이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으며, 김형국 목사님이 그토록 강조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은 단순히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반응하여서 일어난 것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이다.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선택한 자에게 믿음을 주시는 그 하나님의 신비한
경륜을 인정해야 한다. 에베소서 3장에서 바울 사도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성도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놀라움을 더 깊이 알아가기를 간구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며, 인간의 이성과
보편적 상식을 뛰어 넘어 은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온 마음 다해 찬양할 수 밖에 없으며, 더욱 왕되신
주님께 순종하기를 목숨을 다해 애쓰는 자들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5. 적용
1) 지금보다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할 수 있기 위해서 당신이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당신의 삶에서 한걸음 더 전진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 추가로 읽어볼
자료
- 참된 믿음의 열매로서 순종은 믿음과 분리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히브리서 11장은 아벨, 에녹, 노아의 믿음을 언급한 뒤 아브라함을 소개한다. 앞 장에서 말한 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린다. 8절을
보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과 ‘순종’이 나란히
연결된 것에 주목하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사는 삶이 믿음의 본질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의 위대한 표상이라고
역설했다(롬 4:17).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그 즉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에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아브라함은 복종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구체적으로 보였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복종의 행위를 통해 믿음의 열매를 보여 주었다고 증언했다(약 2:21)…
선조들이 우리를 위해 감수했던 희생을 우리가 기꺼이 감수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피가
땅속에서 울부짖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겁쟁이들만
가득한 교회를 결코 존귀하게 여기지 않으실 것이다.
승리하는 교회가 되려면 먼저 싸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목숨을 걸고 기꺼이 영적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신앙의 용사들이 그들 삶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을 때 복음이 가장 명확하고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안락함에 깊이 젖은 우리는
세상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로 살아갔던 사람들처럼 살기보다 세상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을 더 좋아한다…
믿음, 자신 있게 대답하라 | 찰스 스펄전, R. C. 스프로울, 조나단 에드워즈, 황을호, 조계광
저
- 아브라함의 믿음은 단순히 신뢰가 아니라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며, 그것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측면에서
아브라함은 세상의 성을 짓기보다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실 성을 바라며 기다렸다. 그는 단지 거할 땅 이상의 것을 추구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 32)고 말씀하시자 바리새인들은 그 말을 불쾌히 여기며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33절)고
대꾸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39, 56절)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히브리서 저자와 똑같은 말씀을 하신 셈이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을 뿐 아니라 모든 약속을 온전히 이루실 구원자를 고대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는 방식과 새 언약의 공동체에 속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는
방식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지금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과거에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구약
시대의 구원의 근거 역시 소나 염소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였다. 소나 염소의 피는 죄를 없애지
못한다(히 10:4, 11). 그러한 희생 제사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예표일 뿐이다(히 9:13, 14). 그것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예시하는 그림자였다. 오직 그분의 보혈만이 죄를 없앨 수 있다.
아브라함과 우리는 시간상의 위치가 다를 뿐이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은 미래의 십자가를 바라보았고, 우리는 과거의
십자가를 바라본다. 그는 약속을 믿었고, 우리는 성취된 약속을
믿는다. 오늘날 우리에게나 그때의 아브라함에게나 구원의 길은 동일하다.
믿음, 자신 있게 대답하라 | 찰스 스펄전, R. C. 스프로울, 조나단 에드워즈, 황을호, 조계광
저
-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선물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이기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기울일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 6:65)고 말씀하셨다. 같은
복음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반응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 궁극적인 이유는 전자의 경우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난 반면, 후자의 경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교리의 난해한 지점은 성령께서
모든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이 문제로 인해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진다. 구원을 얻는 믿음은 성령의 선물이고 그 선물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 선물을 모두에게 주시지 않는 걸까?
이 문제는 우리를 선택 교리로
인도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4장은 구원을 얻는
믿음을 선택과 연결시킨다. “믿음의 은혜, 곧 선택받은 자들이 믿어 영혼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는 그들 마음속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영의 사역이다.” 이 말은 곧 모두가 신자가 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믿는 능력을 주기로 작정하신 사람들만 신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을 함축한다. 이것이 선택 교리의 핵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로
구원을 얻었다. 우리를 구원한 그 믿음조차도 우리의 육신과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에 의한 결과이다. 이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한다.
믿음, 자신 있게 대답하라 | 찰스 스펄전, R. C. 스프로울, 조나단 에드워즈, 황을호, 조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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