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약
가정, 국가, 기관 할 것 없이 비은혜는 상호 적대의 원인이 된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이다. 비은혜는 모녀간, 부자간, 형제간, 학자간, 죄수간, 인종간에 틈을 벌려 놓는다. 이 틈은 그냥 두면 점점 넓어진다. 그렇게 생기는 비 은혜의 간극에 처방은 오직 하나, 용서라는 가느다란 밧줄 뿐이다. 용서는 비본성적 행위이다. 요셉의 용서가 선뜻 나오지 못한 것은 아직도 상처가 너무 아팠던 이유이고, 용서하기 위해서 크게 울어야 했다.
용서란 받을 때도 왠지 떨떠름하다. 그래서 설사 내가 잘못 했어도, 용서 받기 보다는 갚을 만한 행동을 통해 내 힘으로 피해자 측의 마음을 사려 한다.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고, 집안 싸움을 대물림하며, 자신을 벌하고 남을 벌하는 것 모두는, 용서라는 가장 비본성적인 행위를 외면하기 위한 것이다.
현대인이든 과거의 사람이든 자신에게 피해를 준 자에게 벌을 주기를 신에게 기도한다. 시편에도 세상의 불의에 대해 하나님의 신원을 간구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충격의 반전을 통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불의한 행위를 용서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으로 달아 놓으셨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고 악순환을 끊어 새로 시작할 수 있을 때,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고 쳇바퀴를 끊어 다시 시작하실 수 있는 것이다. 신기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 하기에 달려 있다.
일반인들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예수님의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 이다. 칸트는, “용서란 자격 있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용서라는 단어는 그 자체에 ‘주다’ 라는 말이 들어 있다. 용서에도 은혜처럼 무자격, 과분함, 불공평이라는 묘한 특성이 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타고난 본능에 완전히 어긋나는 비본성적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일까? 용서가 신앙의 중심이 될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까닭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용서를 명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의 핍박하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과 씨름하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짓는 것은, 바로 이 특이하고, 유별나고, 이례적인 특성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나님이 우리 빚을 탕감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따르는 것이다. 먼저 용서받은 경험이 있어야 남을 용서할 수 있는 법이다. 은혜의 복음은 용서로 시작해서 용서로 끝난다.
비은혜의 사슬을 끊는다는 것은 곧 주도권을 쥐고 행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은혜의 중심에는 우리를 향해 주도권을 쥐고 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은 친히 이 땅에 오사 우리로 부터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최악의 대우를 당하신 뒤, 그 잔혹 행위를 오히려 인간을 위한 구원의 길로 삼으심으로써 죄와 보복의 냉혹한 율법을 파하셨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장에서,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결국 용서란 믿음의 행위인데, 남을 용서함으로써 하나님이 나보다 정의를 실현하는 데 뛰어난 분이심을 믿는 것이다. 용서함으로 복수의 권리를 거두고, 공평 문제의 처리를 모두 하나님께 넘겨 드리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물줄기 안에 살 때에만, 남들을 은혜로 대할 힘을 얻을 수 있다.
2. 책에서 한 마디
“용서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에게 베푸는 사랑’으로 정의한 헨리 나우웬은 그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적인 것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마음, 이기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일상 생활에서 연습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용서다. 그러려면 용서가 현명하지 못하고 건전하지 못하며 실효성이 없다는 나의 모든 주장을 이겨 내야 한다… 나와 용서의 대상 사이에 약간의 조건을 둠으로써 계속 통제권을 쥐고 싶은 마음을 벗어 버려야 한다.”
3. 성경적 관점에서 보기
마태복음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개역개정) 6:12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NIV)
6:12 A believer who understands the greatness of the forgiveness that he or she has received can willingly extend such forgiveness to others for their wrongs. The flip side of this thought reveals the selfishness of a person who seeks God’s forgiveness yet willfully refuses to forgive others. 자신이 받은 용서의 위대함을 이해하는 신자는, 그러한 용서를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그들에게까지 확장 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반대편에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지만,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이의 이기심을 드러냅니다.
Bruce Barton et al., Life Application New Testament Commentary (Wheaton, IL: Tyndale, 2001), 32.
4. RCB의 관점으로
얀시의 신앙에 대한 통찰들은 매우 깊고 단순하지 않다. 그의 용서에 대한 이해는 충분히 성경적이면서도 또한 신비하다.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 하기에 달려 있다’ 라는 그의 표현은, 삶의 평생 가운데 두고 씨름해야 할 용서의 신비이다.
용서가 ‘신앙의 중심’이라는 그의 선언은, 크리스천이 어디에 힘을 쏟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방향성을 제시한다. 때로는 많은 성도들이 그저 책을 읽고 배우고 익히는 일들, 혹은 신학을 공부하는 일 자체에 우리의 삶의 목적을 준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들이지만, 신앙의 핵심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신앙은 관계적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며,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일하신다. 그러므로 깨어진 관계가 있다면, 바로 지금 우리가 용서하고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헨리 나우웬 같은 인물도, 용서라는 것은 비효율적이며 쓸데없는 것이라는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와 싸워야 한다라는 것은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누구에게나’ 용서는 쉽지 않다. 용서는 비 본성적인 것이다. 용서는 외면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를 도전해 보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입은 하나님의 은혜를 늘 묵상하고 감격하고 그것에 힘입어, 이제 드디어 누군가를 용서할 때에, 우리는 그동안 이론으로만 배워왔던 참된 신앙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5. 적용
1)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용서하셨는가에 대해서 충분히 묵상해 보세요.
2) 내가 ‘용서의 주도권’을 행사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까? 어떻게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크리스천 북클럽 인도자용 자료 모음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2/10/blog-post_2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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