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약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계산법은 이치에 어긋난다. 잃은 양 한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를 그냥 두고 어둠 속에 뛰어드는 것이 그렇다. 마리아가 1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것이 그렇다. 한 과부의 아주 작은 헌금을 가지고 다른 고액 헌금을 깎아 내리시는 것이 그렇다. 끝나기 한시간 전에 온 사람들이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과 같은 일당을 받는 것이 그렇다.
예수님의 비유는 경제적으로 보면 전혀 말이 안된다. 그것이 그분의 취지였다. 그분이 이 비유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한 것은 바로 은혜이다. 은혜는 일등이냐 꼴찌냐를 따지지 않고, 은혜는 산수가 아니며, 은혜는 선물로 받는 것이지 노력의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품꾼들의 불만의 원인은, “은혜의 파격적인 계산법”에 있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온종일 고생한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지만, 우리 중 자기 공로대로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완전한 삶 근처라도 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공평한 기준대로 받기로 한다면 우리는 다 지옥행으로 끝날 것이다. 은혜의 세계에는 자격이라는 말 자체가 소용이 없다. 예수님이 이런 은혜의 비유를 들려주신 것은, 우리가 눈에는 눈으로 방식의 비은혜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함이다.
은혜는 소위 하나님에 대한 딜레마를 해결해 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행동에 반감을 느끼신다. 인간 안에서는 고작해야 깨어져 흩어진 하나님의 형상의 조각만 보일 뿐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포기하실 수 없고 포기하시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버림받아 마땅했지만, 그 마땅한 것이 임하지 않는다. 자식을 돌아오게만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합리적 계산을 무시하실 수 있다. 그것을 방탕한 아내 고멜과 호세아의 관계를 통해 드러내신다. 다른 남자한테 가버리고 타락한 고멜을 하나님께서는 데려오라고 하신다. 고멜이 받은 것은 공평도 아니고 공의도 아니다. 고멜은 은혜를 받았다.
바울이 귀가 따갑도록 은혜를 이야기한 것은, 우리가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얻었다고 믿을 때 어떤 결과가 올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인간과 화목케 되신 경위를 밝히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인간이 은혜에 부담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불의에는 대가가 따라야 한다는 만인의 본능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바울은 대가가 이미 하나님 자신에 의해 지불되었음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인류를 버리시기보다는 그 아들을 버리셨다. 은혜란 받는 이에게는 값없는 것이지만, 주는 이에게는 전 소유가 다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선심 정도가 아닌 것은, 갈보리에서 엄청난 댓가를 치르셨기 때문이다. 심판이나 혹은 은혜로 충족(fulfill)될 수 있는 우주의 법칙을, 예수님은 친히 그 몸으로 심판을 받으시고 그 법칙을 충족시키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용서의 방도를 찾으셨다.
예수님의 사랑에 공감하면서도, 내 힘으로 그 사랑을 얻으려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왜 그렇게 많고, 그냥 받아들이는게 왜 그리도 힘들까? 계속되는 실패, 희망의 상실, 못난 기분에 짓눌릴 때면 우리는 은혜가 통과되지 않는 껍질 속으로 숨어든다. 고집스레 은혜로부터 등을 돌린다. 우리가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놀라운 성경 말씀을 진실로 믿는다면,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신분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로 볼 수 있다면 어떨까? 하루를 마감할 때 자신을 보는 눈이 얼마나 달라질까?
세상은 비 은혜로 움직이며 모든 일이 나 하기에 달려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르시는 길의 터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그분이 하신 일에 있다. 우리는 성취에 대한 부담 없이 그냥 따르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값비싼 승리는 그분이 이미 우리를 위해 얻어 놓으셨다.
2. 책에서 한 마디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신앙 훈련과 자기 부인에 아무리 힘써도,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의로운 싸움에 아무리 발벗고 나서도 다 소용없다. 은혜란 또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약화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인종 차별, 교만, 포르노, 간음, 심지어 살인죄를 지어도 별수 없다. 은혜란 무한한 신의 사랑으로 가능한 최대치만큼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뜻한다.”
3. 성경적 관점에서 보기
마태복음 20: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개역개정) 20:14 Take your pay and go. I want to give the man who was hired last the same as I gave you. (NIV)
In this parable, Jesus pointed out that salvation is not earned, but given freely only because of God’s great generosity, which goes far beyond our human ideas of what is fair. The message of the parable is that God’s loving mercy accepts the lowest member of society on an equal footing with the elite.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이라는 것은 사람이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공평에 대한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위대한 관용 때문에 거저 주어지는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이 비유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자비가,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라도 엘리트와 동등한 입장에서 그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Bruce Barton et al., Life Application New Testament Commentary (Wheaton, IL: Tyndale, 2001), 89.
4. RCB의 관점으로
우리가 성경적인 은혜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는, 얀시가 이야기한 것처럼 은혜가 “파격적”으로 받아들여지는가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은혜를 이야기하고 설교하지만, 실상 그 은혜라는 것조차 “내가 어느 정도 잘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호의를 그것보다는 많이 베푸는 수준”의 은혜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혜는 말 그대로 은혜이다. 예수님이 강조하셨던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은혜는 사실상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그것이 은혜이다.
내가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내가 전적인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하나님이 이미 이루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의 구원과 생명과 가진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할 때에, 예수님의 가치가 드디어 받아들여지게 된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의 세계에 이미 들어갔다. 내 삶에 이루어진 모든 것은, “오직 전적으로 완벽하게 확실히 틀림없이 흔들리지 않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받은 은혜이며, 그래서 언제나 감사할 뿐이다. 내가 오늘 하루에도 할 수 있는 것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기쁨으로 그저 그분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5. 적용
1)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호세아 11:8) 말씀에서, 에브라임과 이스라엘 대신 각자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읽어보세요.
2)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신분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바라보세요.
*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크리스천 북클럽 인도자용 자료 모음
https://readingchristianbookclub.blogspot.com/2022/10/blog-post_2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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